No. 20 (2025. 06. 24)
제 작은 딸은 책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가끔 딸이 제 서가를 훑어보면서 “아빠, 뭐 재미있는거 있어요?”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딸이 좋아할 만한 책을 추천해 줍니다. 딸은 스릴러 소설을 좋아합니다. 저도 스릴러를 좋아합니다. 딸은 제가 추천한 책을 읽고 돌려주면서 성격대로 한 문장으로 평을 합니다. “제 취향은 아니네요.” 또는 “나쁘지 않네요.”하고요.
제가 추천한 책이 모두 딸의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딸이 제게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아빠의 취향을 인정해 준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거 같습니다. 가끔 딸도 제게 책을 추천해 줍니다. 딸이 추천해 주는 책은 모두 재미있습니다. 제가 딸의 취향을 알고 있는 것보다 딸이 제 취향을 더 잘 알고 있나 봅니다.
한 번은 딸이 책 제목을 이야기하면서 아빠 혹시 이런 책 읽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서가에서는 찾지 못했지만 제가 읽었을 것 같다는 겁니다. 이북(e-book)으로 읽은 책이었습니다. 역시 제 취향을 잘 아는 그녀입니다.
딸에게 제 이북 계정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알려 주고 들어가서 마음대로 읽으라고 했습니다. 딸은 그때까지 이북 사용지가 아니었습니다. 이후 제 계정에서 이 책 저 책을 찾아 읽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아직 읽지 않은 책에 밑줄이 쳐 있거나, 또는 읽었어도 제가 밑줄 치지 않은 부분에 밑줄이 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딸이 어떤 책을 읽는지, 어떤 부분에 밑줄을 긋는지 훔쳐보는 일은 흥미로웠습니다. 이런 책도 좋아하는구나, 이 부분은 왜 밑줄을 쳤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저라면 절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문장에 밑줄이 되어 있었거든요. 스릴러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에세이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이북 계정을 공유한다는 것은 제법 불편한 일입니다. 딸과 우연히 같은 책을 동시에 읽고 있을 때 책을 열었더니 내가 읽던 페이지가 아니라 딸이 읽던 페이지가 열리는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좀 불편해도 딸이 요즘 어떤 책을 읽는지, 어디에 관심을 갖고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러던 딸이 얼마 전에 서가 독립을 했습니다. 자신의 이북 계정을 만들고 자신이 읽을 책을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무슨 책을 사고 읽는지 잘 모릅니다. 마치 주거를 독립하듯 지적으로 독립한 딸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무슨 책을 읽는지 보여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줄 수 있다.‘(‘Show me what you read, and I’ll tell you who you are.’)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인의 사무실을 방문하면 서가에 눈이 갑니다. 공학박사의 서가에 꽂힌 윤동주의 시집을 발견하기도 하고 백전노장 CEO가 읽다가 덮어 둔 철학책의 제목을 엿보기도 합니다. 수십 년을 알고 지냈어도 몰랐던 지인의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이 이북을 읽게 되어 종이책 서가의 책보다 이북 서가의 책이 더 많아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발견의 기쁨이 없어지지 않을까요? 거의 이북으로만 읽는 제 스릴러 독서 취향을 딸과 제 이북 앱을 제외한 주변 사람들이 아직 모르듯이 말입니다.
박찬구 코치 드림
chankoo.park@parkjam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