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코칭 고객의 일정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무실의 대형 TV 화면에 월 일정표가 띄워져 있어서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주말에도 고객사 간담회나 임원 간담회 같은 일정이 빽빽했습니다. ‘무슨 간담회를 주말에 할까?’ 하다가, '아, 골프 모임이구나.' 하고 곧 알아차렸습니다. 회사를 그만 둔지 몇 년 지나니 감이 떨어졌나 봅니다. 전에는 골프를 그린 미팅이라고 했는데 간담회라고도 부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30대 초반에 유학에서 돌아와 입사한 직장에서 상사가 물었습니다.
“박과장도 미국에서 운동 좀 했나?”
“네, 수영했습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네?”
“골프 말이야.”
“아, 예. 치기는 합니다”
골프가 홍길동의 아버지나 형님인가 싶었습니다. 골프를 골프라 부르지 못하고 운동이라 부르니 말입니다. 골프를 사치성 운동이라고 여길 때 돌려서 말하는 습관이 굳어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골프 약속을 골프 약속이라 부르지 못하고 그린 미팅이나 간담회나 운동 약속이 되었습니다.
골프를 골프라 부르지 못하듯이 조직에도 직접 부르지 못하는 이름이나 직함이 있습니다. 창업자나 회장, 대표이사 같은 최고경영자나 의사결정자의 이름이나 직함입니다. 그분들을 영문 이니셜로 부르거나 VIP라고 부르는 회사나 조직이 꽤 많습니다. 함부로 그분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뜻인가 봅니다.
물론 외부인이 많은 장소에서는 보안 상 그렇게 대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부 회의나 문서에도 그렇게 써야 할까요? 그 이니셜이 누구인지는 구성원은 물론 외부 사람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일종의 겉멋이나 쓸데없는 관행이 아닐까요? 타이핑할 때 한영 변환키만 괜히 두 번 더 누르게 됩니다.
해리 포터에 등장하는 악당 마법사인 볼드모트의 이름은 그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금기 사항이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해리 포터의 스승인 덤블도어는 해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볼드모트라고 부르거라, 해리. 뭔가를 부를 때는 항상 알맞은 이름을 써야지. 이름을 두려워하면, 그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커지기 마련이다.” (“Call him Voldemort, Harry. Always use the proper name for things. Fear of a name increases fear of the thing itself.”)
높은 분의 이름을 이니셜로 적거나 부르는 것이 편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감히 이름이나 직함을 적지 못해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니셜로 상사를 칭하다 보면 상사가 가깝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차마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볼드모트처럼 두려움의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글로벌 회사는 높은 분을 부를 때 성도 아닌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언어 예절 상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지만, 이니셜이나 VIP로 윗분을 부르는 것은 권력을 지나치게 떠받들거나, 아니면 그들을 특권화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우리 사회도 그런 두려움이나 심리적 장벽을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높은 분들의 이름을 찾아 드리는 게 어떨까요? 그분들을 대면한 자리에서 이니셜로 부를 것은 아니니까요.
박찬구 코치 드림
chankoo.park@parkjamun.com